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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쪽 써주세요, 어차피 사람이 안 읽습니다”
LegalCrew
관리자
2026-08-03 10:16 ·조회수 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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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한겨레원문 보기 →
책은 사라지지 않았다. 독자가 바뀌었을 뿐이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 고시촌에서 1500쪽 민법 교과서를 열 번씩 되풀이해 읽던 고시생은, 김앤장 변호사를 거쳐 이제 사람이 읽지 않는 책을 만드는 리걸테크의 리더가 됐다. 그 책의 독자는 인공지능(AI)이다.
이진(43) 엘박스 대표는 지난해 시작한 출판 사업 ‘엘박스 스칼라’를 이렇게 설명했다. 2019년 설립된 리걸테크 기업인 엘박스는 판례 검색 데이터베이스로 출발해 현재는 국내 변호사의 약 70%가 이용하는 법률 에이아이 플랫폼으로 성장했다. 대검찰청과 김앤장 법률사무소, 삼성전자를 비롯해 1700곳이 넘는 기관·법인이 엘박스를 쓴다. 이진 대표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법률 리서치의 상당수”가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그 출발점은 소박하다 못해 무모했다. 2019년 개발자 한 명과 단둘이 스타트업을 창업한 그가 처음 한 ‘일’은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판결문을 매일 새벽 3시까지 한 글자씩 타이핑해 컴퓨터로 옮기는 것이었다. 긴 판결문은 600쪽, 각주가 400개였다. 혼자 치다 감당이 안 되자 아르바이트생 330명을 뒀고, 투자를 받은 뒤에야 자동화했다.
엘박스의 운명이 바뀐 날을 이 대표는 정확히 기억한다. 챗지피티가 공개된 2022년 11월30일. “바닷가에 앉아 판결문을 모으며 파도를 수백 개씩 봤는데, 이 파도는 크다. 반드시 타야 한다”고 생각했단다.
검색어를 입력하면 판례 2천 개를 나열하던 데이터베이스가 대규모 언어모델(LLM)의 추론 능력과 결합하면서 “사실관계를 입력하면 결론을 도출하는” 서비스로 진화했다. 법적 추론이란 대전제에 소전제를 대입하는 ‘삼단논법’의 무한 반복인데, 에이아이가 이 삼단논법을 직접 수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판례 검색부터 법리 검토, 문서 작성까지 한 화면에서 끝낼 수 있게 됐다.
엘박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에이아이가 활용할 법률 전문 서적(데이터) ‘스칼라’를 직접 펴내기 시작한 것이다.
―스칼라는 어떤 서비스인가.
“종이책의 시대가 1단계라면 이(e)북이 2단계인데 둘의 공통점은 독자가 사람이라는 점이다. 3단계는 독자가 사람이 아니다. 요즘 누가 1500쪽 교과서를 처음부터 읽나. 인공지능이 다 읽고 답을 해주는데. 소비 방식이 바뀌면 생산과 유통도 궤를 맞춰야 한다. 다만 이 변화는 기존 출판 구조로는 풀기 어려운 문제였다. 에이아이 서비스를 직접 운영해 온 우리가 더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직접 나섰다.”
―기존 법률 서적을 그대로 활용하면 안 되나.
“독자가 에이아이로 바뀌면 집필 방법 자체가 달라져야 한다. 종이책은 분량 제한이 있지만 스칼라는 없다. 프랑스·독일·미국 사례와 비교하며 10만쪽을 써도 된다. 어차피 사람이 안 읽으니까. 집필 우선순위도 예전과 다르다. 주석서라는 건 모든 조문을 논문 수준으로 파고드는 건데, 기존 방식으로는 법률가 300명이 조문을 3개씩 맡아 쓰고, 개정에 6~7년이 걸렸다.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다. 엘박스는 가장 많이 열람되는 조문을 알기에 많이 읽히는 20%를 먼저 출간하고 나머지는 나중에 쓰면 된다.”
결과물은 이미 나왔다. 한국형사법학회와 함께 만든 형법 주석서가 출간됐고, 한국형사소송법학회·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과의 형사소송법 주석서, 한국증권법학회의 자본시장법 주석서가 집필되고 있다. 한국법학원과도 업무협약(MOU)을 맺었다.
―저자에게는 어떤 혜택이 있나.
“에이아이가 답변에 활용하는 인용 횟수를 기반으로 정산한다. 저자마다 대시보드가 있어서 어떤 문단이 얼마를 벌었는지 날마다 확인할 수 있고, 그 문단을 집중 보강할 수 있다. 판례도 붙이고 외국 사례도 조사하면 더 읽히니까. 처음부터 읽힐 책을 수요에 맞춰 쓰는 셈이다.”
―왜 집필은 여전히 사람이 하나. 에이아이가 쓰면 되는데.
“법은 설득의 학문이기에 권위가 중요하다. ‘서울대 로스쿨의 아무개 교수가 그렇게 봤다’는 것이 갖는 무게가 있다. 인공지능 시대에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남을 중요한 것 중 하나가 권위의 부여자, 나아가 책임의 주체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도구로 에이아이를 쓰더라도, 내 이름을 걸고 나간 글은 내가 쓴 것이며, 내가 책임져야 한다.”
엘박스가 정확성 기준을 높게 잡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법률 에이아이가 ‘청구할 수 있다/없다’가 틀리면 비참한 일이다. 의료로 치면 ‘암이다/아니다’가 바뀌는 것이다.”
법률 에이아이의 완성 조건으로 이 대표는 세 가지를 꼽았다. ①결론이 정확할 것, ②근거를 제시할 것, 그리고 ③이용자가 원하면 언제든 그 근거의 원문을 열어 검증할 수 있을 것.
“20년차 변호사가 본인의 리걸 마인드와 반대되는 답을 (법률 에이아이에서) 받았을 때 ‘대법관이 쓴 주석서에 정말 그렇게 돼 있다고?’ 하고 열어볼 수 있어야 한다. 열어보고 ‘나는 그렇게 읽히지 않는다’면 자기 주관대로 가면 된다. 기술로 답을 정확하게 만드는 것 못지않게, 최종 답변에 대한 인간의 검증 가능성을 열어주는 게 중요하다.”
인터뷰 말미에 스칼라의 저자인 지금의 권위자들이 20년 뒤 은퇴하고 나면 엘박스로 공부한 세대가 새로운 권위자로 집필하게 되는 것이냐고 물었다. 시종일관 막힘없던 이 대표가 처음으로 말을 골랐다. “에이아이 시대에 권위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중요한 질문이다. 하지만 그 답은 잘 모르겠다.”
잘 모르겠다는 그 마지막 말이 오래 남았다. 답을 만드는 사람도 모르는 미래가 오고 있다.
이진(43) 엘박스 대표는 지난해 시작한 출판 사업 ‘엘박스 스칼라’를 이렇게 설명했다. 2019년 설립된 리걸테크 기업인 엘박스는 판례 검색 데이터베이스로 출발해 현재는 국내 변호사의 약 70%가 이용하는 법률 에이아이 플랫폼으로 성장했다. 대검찰청과 김앤장 법률사무소, 삼성전자를 비롯해 1700곳이 넘는 기관·법인이 엘박스를 쓴다. 이진 대표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법률 리서치의 상당수”가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그 출발점은 소박하다 못해 무모했다. 2019년 개발자 한 명과 단둘이 스타트업을 창업한 그가 처음 한 ‘일’은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판결문을 매일 새벽 3시까지 한 글자씩 타이핑해 컴퓨터로 옮기는 것이었다. 긴 판결문은 600쪽, 각주가 400개였다. 혼자 치다 감당이 안 되자 아르바이트생 330명을 뒀고, 투자를 받은 뒤에야 자동화했다.
엘박스의 운명이 바뀐 날을 이 대표는 정확히 기억한다. 챗지피티가 공개된 2022년 11월30일. “바닷가에 앉아 판결문을 모으며 파도를 수백 개씩 봤는데, 이 파도는 크다. 반드시 타야 한다”고 생각했단다.
검색어를 입력하면 판례 2천 개를 나열하던 데이터베이스가 대규모 언어모델(LLM)의 추론 능력과 결합하면서 “사실관계를 입력하면 결론을 도출하는” 서비스로 진화했다. 법적 추론이란 대전제에 소전제를 대입하는 ‘삼단논법’의 무한 반복인데, 에이아이가 이 삼단논법을 직접 수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판례 검색부터 법리 검토, 문서 작성까지 한 화면에서 끝낼 수 있게 됐다.
엘박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에이아이가 활용할 법률 전문 서적(데이터) ‘스칼라’를 직접 펴내기 시작한 것이다.
―스칼라는 어떤 서비스인가.
“종이책의 시대가 1단계라면 이(e)북이 2단계인데 둘의 공통점은 독자가 사람이라는 점이다. 3단계는 독자가 사람이 아니다. 요즘 누가 1500쪽 교과서를 처음부터 읽나. 인공지능이 다 읽고 답을 해주는데. 소비 방식이 바뀌면 생산과 유통도 궤를 맞춰야 한다. 다만 이 변화는 기존 출판 구조로는 풀기 어려운 문제였다. 에이아이 서비스를 직접 운영해 온 우리가 더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직접 나섰다.”
―기존 법률 서적을 그대로 활용하면 안 되나.
“독자가 에이아이로 바뀌면 집필 방법 자체가 달라져야 한다. 종이책은 분량 제한이 있지만 스칼라는 없다. 프랑스·독일·미국 사례와 비교하며 10만쪽을 써도 된다. 어차피 사람이 안 읽으니까. 집필 우선순위도 예전과 다르다. 주석서라는 건 모든 조문을 논문 수준으로 파고드는 건데, 기존 방식으로는 법률가 300명이 조문을 3개씩 맡아 쓰고, 개정에 6~7년이 걸렸다.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다. 엘박스는 가장 많이 열람되는 조문을 알기에 많이 읽히는 20%를 먼저 출간하고 나머지는 나중에 쓰면 된다.”
결과물은 이미 나왔다. 한국형사법학회와 함께 만든 형법 주석서가 출간됐고, 한국형사소송법학회·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과의 형사소송법 주석서, 한국증권법학회의 자본시장법 주석서가 집필되고 있다. 한국법학원과도 업무협약(MOU)을 맺었다.
―저자에게는 어떤 혜택이 있나.
“에이아이가 답변에 활용하는 인용 횟수를 기반으로 정산한다. 저자마다 대시보드가 있어서 어떤 문단이 얼마를 벌었는지 날마다 확인할 수 있고, 그 문단을 집중 보강할 수 있다. 판례도 붙이고 외국 사례도 조사하면 더 읽히니까. 처음부터 읽힐 책을 수요에 맞춰 쓰는 셈이다.”
―왜 집필은 여전히 사람이 하나. 에이아이가 쓰면 되는데.
“법은 설득의 학문이기에 권위가 중요하다. ‘서울대 로스쿨의 아무개 교수가 그렇게 봤다’는 것이 갖는 무게가 있다. 인공지능 시대에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남을 중요한 것 중 하나가 권위의 부여자, 나아가 책임의 주체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도구로 에이아이를 쓰더라도, 내 이름을 걸고 나간 글은 내가 쓴 것이며, 내가 책임져야 한다.”
엘박스가 정확성 기준을 높게 잡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법률 에이아이가 ‘청구할 수 있다/없다’가 틀리면 비참한 일이다. 의료로 치면 ‘암이다/아니다’가 바뀌는 것이다.”
법률 에이아이의 완성 조건으로 이 대표는 세 가지를 꼽았다. ①결론이 정확할 것, ②근거를 제시할 것, 그리고 ③이용자가 원하면 언제든 그 근거의 원문을 열어 검증할 수 있을 것.
“20년차 변호사가 본인의 리걸 마인드와 반대되는 답을 (법률 에이아이에서) 받았을 때 ‘대법관이 쓴 주석서에 정말 그렇게 돼 있다고?’ 하고 열어볼 수 있어야 한다. 열어보고 ‘나는 그렇게 읽히지 않는다’면 자기 주관대로 가면 된다. 기술로 답을 정확하게 만드는 것 못지않게, 최종 답변에 대한 인간의 검증 가능성을 열어주는 게 중요하다.”
인터뷰 말미에 스칼라의 저자인 지금의 권위자들이 20년 뒤 은퇴하고 나면 엘박스로 공부한 세대가 새로운 권위자로 집필하게 되는 것이냐고 물었다. 시종일관 막힘없던 이 대표가 처음으로 말을 골랐다. “에이아이 시대에 권위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중요한 질문이다. 하지만 그 답은 잘 모르겠다.”
잘 모르겠다는 그 마지막 말이 오래 남았다. 답을 만드는 사람도 모르는 미래가 오고 있다.